얼마 전 한국에서 세계로 파송되는 선교사의 수가 2만 명이 넘어섰다는 보도를 접했다. 미국 다음으로 많은 숫자이다. 통계상으로 볼 때, 한국교회는 세계 선교를 담당하는 주역임에 틀림없다. 이런 위치 때문에 선교와 관련하여 타종교나 세속 언론으로부터 주목을 받고, 그 공격적인 자세와 방법에 대한 질타도 많이 당한다.

 

세계만방으로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행위 자체가 문제가 될 리 없다. 마태복음은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예수님의 지상 사명으로 끝을 맺고 있다 (28:19-20). 사도행전은 ”성령이 너희에게 내리시면, 너희는 능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에서, 그리고 마침내 땅 끝에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될 것이다“ 라는 예수님의 선교 사명으로 시작하고 있다 (1:8). 성경을 진지하게 묵상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선교적 삶은 그리스도인 삶의 본질임을 바로 알 수 있다.

 

문제는 그 선교의 개념을 너무 좁게 해석하는 데 있는 것 같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적인 삶을 포함한 모든 삶의 영역에서의 선교적 삶에 대한 비전과 실천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그 결과 인생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가정생활, 직장생활, 여가생활, 사회생활은 단지 선교의 수단이 되는 영역으로 남겨지게 된다. 그 삶 자체 가운데 하나님 나라의 실현이라는 비전이 구체화되는 열매를 보기 어렵게 된다. 전 삶의 영역 가운데 이루어지는 선교적 삶에 대한 교육도 미비하다. 그래서결국 선교란 일상 삶으로부터의 이탈이고, 분리된 ‘종교적’ 헌신 영역이 되고 만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가정이 무엇이고, 그런 가정을 어떻게 이루어 나갈 수 있는 지를 가르치고 열매를 맺어 나아가는 일을 지상 명령으로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직업의 태도를 갖추고, 그 뜻에 따라 실천할 때 주어지는 구원의 열매를 체험해 본 적이 있는가? 함께 살아가는 이웃과, 함께 공존하는 자연과 아름다운 교제를 이루어갈 때 맺어지는 하나님의 의와 사랑을 알고 있는가? 내가 속해 있는 공동체 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내 존재로 말미암아 그 구성원들이 화해와 평화의 관계로 변화해 가는 기쁨을 누리고 있는가? 

 

오늘날처럼 세계가 하루 생활권으로 들어간 시대에 “땅 끝”의 개념을 지리 개념으로만 이해할 수는 없다. 오히려 하나님의 손길이 닿지 않는 것처럼 여겨지는 모든 생활 영역을 포함한다고 보고 싶다. 선교란 특별한 소명을 받은 소수의 그리스도인들이 특수한 헌신을 하는 영역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의 삶의 자세를 말한다.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면, 무슨 일을 하며 살든지, 모든 삶 가운데 하나님 나라의 실현이라는 목적가운데 살아가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선교의 핵심은 사는 것이다. 

 

“공격적 선교”라는 단어는 그리스도인의 단어가 아니다. 모든 삶에서 소금과 빛으로 살아가는 것이 선교적 삶이라면, 그리스도인의 삶은 섬기는 것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그리고 우리가 기대하는 결실은 하나님의 나라이다. 하나님이 주체이시고, 목적이시고, 방법이신, 그런 나라의 실현을 기대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교적 삶이란 하나님이 역사하는 길을 잘 따라가는 것이다. 이 시대에 세계만방에서 하나님이 구원을 위해 행하시는 손길을 잘 알아차리고, 그 역사에 동참하는 것이 선교이다. 오늘날 가정에게 주는 하나님의 음성은 무엇인가? 오늘날 직업 가운데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은 무엇인가? 우리들의 나라와 사회에 주어진 하나님의 요청은 무엇인가? 오늘날 각 지역에서 들려오는 을부짖음이 무엇이고, 우리는 여기에 어떻게 응답하고 있는가? 모든 삶의 영역에서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을 잘 듣고, 기쁨으로 따라가는 것이 선교의 삶이다.

 

천진석 목사 (CWN 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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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들이 동성애를 성경적 관점으로 이해하려는 시도는 지극히 당연하다. 왜냐하면 성경은 그리스도인의 신앙 규범과 실천을 형성하는 원천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성경은 성경을 읽는 사람의 신학적 관점에 따라 서로 다른 해석 방식으로 이해되고, 따라서 본문의 의미도 다르게 파악되기 마련이다.


일반적으로 근본주의자는 성경은 하나님의 직접 계시로 기록된 책으로 문자나 내용에 한 점의 오류도 없기 때문에 성경 본문을 시공을 초월하여 동일하게 적용할 수 있다고 믿는다. 존 스토트를 비롯한 복음주의자들은 성경을 하나님의 계시가 성경 저자들의 인격과 문화를 통해 전해진 '이중저작물'로 여긴다. 그들은 성경을 현재에 적용하기 위한 재해석은 필요하나, 규범상 오류는 없다고 믿는다. 반면에 자유주의 해석을 따르는 사람들은 성경은 시대의 문화와 상황에 따라 해석된 하나님 신앙을 집대성한 책으로 문자, 내용, 규범에 있어서 현재적 관점으로부터 재해석되어야 한다고 본다.


제임스 돕슨, 리챠드 헤이슨, 대니얼 헬미니아크


   
 
  ▲ 제임스 돕슨.  
 
그러므로 동성애에 대한 성경적 이해도 이런 신학적 입장에 따라 해석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창세기 19장에 등장하는 소돔의 악행에 관한 해석을 보자. 포커스 온 패밀리(Focus on Family) 운동을 이끌고 있는 제임스 돕슨(James Dobson)을 비롯한 많은 근본주의자들에게 소돔 이야기는 인간의 죄악과 하나님의 심판을 상징하는 좋은 본보기이다.

그리고 이 소돔을 멸망으로 이끈 대표적인 죄악 중의 하나가 동성애였다고 본다. 19장 5절에 등장하는 "상관하다"(yada, to know)라는 말이 바로 동성애 행위를 가리키며, 그래서 소돔에서 유래한 영어의 Sodomite 자체가 변태적인 성교를 지칭하는 동성 행위를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그리고 에스겔서 16장에서 소돔의 죄악들을 열거할 때, "가증한 일" (abomination)을 언급하고 있는데(50절), 이것이 바로 동성애를 말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레위기 18장 22절에 동성애를 동일한 "가증한 일"로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신약성경의 도덕적 비전> (The Moral Vision of New Testament)의 저자인 리챠드 헤이스(Richard B. Hays)를 비롯한 복음주의 입장에 있는 학자들은 대체로 소돔의 주요 죄악이 동성애보다는 사회적 불의에 있었음을 강조한다.


에스겔서에 따르면 분명히 소돔인의 동성애 행위는 "가증한 일"로 정죄되고 있으나, 그들의 주된 죄악은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도와주지 않은 것이었다(겔 16:49). 그리고 예수님이 소돔의 죄악을 말씀할 때, 하나님의 사람들(천사들)을 영접하지 않은 것만 언급되고 있지 동성애는 언급이 없음을 상기하고 있다(마10:5-15).


즉 성경은 소돔인의 동성애 행위는 악행으로 보나 그것이 소돔의 죄악을 대표하는 죄는 아니라는 것이다. 헤이스는 성경에 동성애 관련 내용은 6회 정도 등장하지만, 반면에 경제적 불의에 관한 내용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이 등장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자유주의 혹은 진보주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는 대니얼 헬미니아크(Daniel Helminiak)는 <성경이 실제로 동성애에 관하여 말하고 있는 것>(What the Bible Really Says about Homosexuality)에서 소돔의 죄악은 무정한 문전박대(Inhospitality)에 있었다고 말한다. 소돔 사람들은 나그네에게 무정하고 잔인했다. 그래서 낯선 나그네들을 '강간(rape)'하려 했다. 혹은 이 수상한 사람들을 심문하려 했다. (그는 "상관하겠다"로 번역된 야다 yada를 왜 그냥 문자적으로 '안다'로 이해하면 안 되냐고 반문한다. 이 단어가 구약에 943회 등장하지만 단지 10회만 성적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성관계가 아니라 심문이란 뜻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고 말한다.)


당시 문화에서 남자에게 최대의 모욕은 여성처럼 취급당하는 것이었다. 즉 남성은 늘 관통(to penetrate)의 주체가 되어야 하는데, 수동적으로 관통당하는(to be penetrated) 자로 만들어버리려 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소돔 이야기에서의 초점은 동성애가 아니라 성폭력이다.


그리고 에스겔서의 "가증한 일"은 일차적으로 에스겔서의 맥락에서 해석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본문의 전후맥락을 보았을 때, "가증한 일"은 동성애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간음(adultery)’, ‘매춘(harlotry)’과 관련된 것이다. 즉 우상숭배를 가리키는 것이다. 하나님을 향하여 신실하지 못하고, 신성모독을 일삼고, 아이들을 우상 제물로 바치고, 사람을 죽이는 행동을 정죄한 말씀이라는 해석이다.


레위기의 ‘가증한 일’에 대한 세 가지 관점


   
 
  ▲ 리처드 헤이스.  
 
이와 관련하여 레위기 18:22에 등장하는 "가증한 일(abomination)"에 대한 해석들을 살펴보자. 근본주의적 보수주의 입장에 볼 때, 동성애 행위는 윤리적 차원을 넘어선 창조 질서 (성, 가족)를 파괴하는 행위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백성이 지녀야할 정결을 더럽히는 행위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자를 "반드시 죽이라"고 했다(렘20:13). 오늘날 예수님의 아가페 사랑의 정신에 따라 문자대로 실행하지 않지만, 동성애가 얼마나 하나님이 미워하는 행위인지를 인식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일반적으로 복음주의 입장도 레위기 본문을 통해 동성애가 하나님 보시기에 "가증한 일"이라고 이해하지만, 동성애를 가증스러운 것의 대표로 내세우지는 않는다. 이 본문을 보면, 간음, 근친상간, 수간 등의 죄들이 열거되어 있다. 그중에 동성애는 이방 종교행위와 연관된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가증한 일"로 분류되고 있다고 본다.


그리고 이 본문이 등장하는 전후 맥락이 신약성경의 시각에서 보면 이미 폐기된 정결법 중에 포함되어 있음을 지적한다.(할례, 음식 규정 등) 그러나 신약성경이 적은 분량이지만 동성애를 일관되게 부자연스러운 성행위로 규정하고 있기 때문에 죄로 이해하고자 하는 입장이다. 즉 유독 동성애 문제만 "가증한 일"로 침소봉대 하지 않는 가운데 여전히 죄로 인식하고자 하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자유주의 입장의 헬미니아크는 이 본문의 주제가 윤리와 구분된 특수한 종교적 정결법 상의 금지법(taboo)이었다고 본다. 그리고 이 금지법을 어긴 사람을 극형에 처하는 이유는 가부장적인 족장 사회를 견고히 유지하려는 의도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동일한 맥락에서 부모를 저주한 자, 간음한 자를 사형에 처하라고 한 것을 보면 이를 알 수 있다. 또한 당시대인들이 "종의 섞음(mixing of kinds)"을 불결한 것으로 이해하는 세계관 (레위기 19:19, 신명기 22:11)에 따라 이미 고정된 종의 변형을 금지하는 차원에서 이 금지법이 주어진 것으로 본다. 이런 금지법은 근본적으로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정결법이 일환이었다.


이 문제가 오직 레위기에서만 논의되고 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구약성경에서 유일하게 동성 간의 성행위를 문제 삼는 정결법이 특수한 시대의 금지법이었고, 예수님과 제자들이 이 정결법을 문자적으로 지키기를 부정했으므로, 더 이상 신약성경을 통해 동성애를 정죄할 근거를 찾을 수 있으리라 기대하면 안 된다고 주장한다.


특히 헬미니아크는 "가증한 일"이란 단어의 언어 분석을 통해 이 말은 죄와 결부된 단어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여기서 사용된 히브리어 '토에바(toevah)'는 부정함, 더러움, 타부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한다. 도덕적인 의미에서 불의나 죄를 가리키는 단어는 '찌마(Zimah)'였다. 그래서 헬라어 오십인역에서 이 단어를 브델리그마(bdelygma), 즉 '제의적 범법(ritual offense)'으로 해석했다. 헬라어에서 도덕적 정죄를 가리키는 범법(anomia), 악행(poneria), 불경건(asebia)이라는 단어들이 따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단, 에스겔서 16장에서 소돔의 악행인 부도덕성과 우상숭배를 말할 때, 윤리적 죄의 개념인 아노미아(anomia)로 번역하였다. 레위기에서 "가증한 일"로 번역된 부분은 윤리적 죄가 아니라 당시 이스라엘의 특수한 민족적 종교법을 준수하지 않은 것에 대한 정결법상의 판단이라는 해석이다.


바울의 동성애 언급에 대한 세 가지 해석


   
 
  ▲ 대니얼 헬미니아크  
 
신약성경 로마서 1장에서 바울이 언급한 동성애 관련 부분도 신학적 입장에 따라 해석이 달라진다. 동성애가 성을 "역리로(para physin)" 사용하고 있다는 비난(롬1:26-27)에 대한 해석이 그 핵심이다.

근본주의 입장은 바울이 동성애는 우상숭배 결과로 빚어진 인간 타락의 대표적인 것으로 보았다는 의견을 피력한다. 그래서 하나님을 떠나 우상숭배에 빠진 인간의 타락상을 열거하는데 특히 동성애를 부각시켰다는 것이다. 26절에 "내어버려두사"라고 표현할 만큼 구제받기 힘든 죄악이라는 것이다. "역리로(para physin)" 쓴다는 것은 창조 질서에 반하는 행위를 일컫는 말이다.


복음주의권 학자인 헤이스도 바울이 동성애를 우상숭배 결과로 빚어진 인간 타락 중 하나로 보았다고 해석한다. 하나님을 떠난 인류의 도덕적 상태를 보여주려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내어버려두사"라는 말씀은 인간의 타락이 하나님 진노의 이유가 아니라 결과임을 강조한다. 즉 이 말씀은 윤리적 정죄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타락한 인간 실존의 상태를 전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유독 왜 동성애인가? 그것은 동성애가 하나님이 창조 질서를 왜곡시키는 방식에 관한 이미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동성애야 말로 창조주로부터 멀어진 인류의 비극적 혼동과 소외의 자명한 증거라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동성애 행위는 죄악의 결과이지만, 특별히 다른 죄악이 비해서 더 비난 받아야 할 죄는 아니다.


헤이스는 "자기 의로 동성애를 판단하는 것은 동성애 행위 자체만큼이나 죄악된 일"이라고 말한다. 이 바울의 본문은 유대인이나 이방인 모두 의로우신 하나님의 공정한 심판 아래 똑 같이 정죄 받고 있음을 선언하고 있다는 것이다.


헬미니아크는 바울이 언급하고 있는 동성애 행위는 윤리적 타락과 구분된, 당시 사회 관습에 반하는 문제였다고 본다. 즉 바울은 우상숭배의 결과를 성의 문제와 윤리적 타락, 두 범주로 구분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당시 로마교회는 내분에 휩싸여 있었다. 유대인 그리스도인과 이방인 그리스도인의 율법 이해와 삶의 방식 차이 때문이었다. 그래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 진리 안에서 서로 간의 화해를 원했다. 그래서 성의 문제를 다루며 마치 유대인의 생활방식 옹호하는 듯, 전통적인 정결법을 중시하는 듯, 이방인은 더럽다는 편견을 지니고 있는 듯 썼다는 것이다.


그러나 윤리 문제를 다룰 때는 일반화를 통하여 유대인을 포함하여 모든 자기 의에 빠져 있는 자들에 대하여 경책하고 있다고 본다. 궁극적으로 이 본문은 동성애를 정죄하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동성애를 정결법의 이름으로 정죄하고 있는 유대인들도 이방인들과 마찬가지로 우상숭배에 빠져 있음을 밝히려 하는 데 주목적이 있었다고 말한다.


헬미니아크는 바울이 동성애 문제를 소재로 삼은 것은 이 문제가 이방인 그리스도인과 유대인 그리스도인의 충돌을 피할 수 있는 ‘안전지대’였기 때문은 아니었는지 질문한다. 만약에 동성 성교 대신 음식이나 할례 문제로 예를 들었다면, 아마도 로마 교회는 분열되고 말았을 것이라고 지적한다.


헬미니아크는 "역리로(Para Physin)"라는 개념이 사회 관습적인 것인지 자연법적인 것인지를 논한다. 바울은 자연(physis) 개념을 그때그때 다양하게 사용한다. 갈라디아서 2장15절과 로마서 2장27절에서 "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이방 죄인이 아니로되" 에서는 물리적인 개념으로 사용한다. 로마서 2장14-15절에서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라고 말 할 때는 본능적인 개념으로 사용한다. 갈라디아서 4장8절에서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노릇 하였더니"라고 할 때는 영적인 개념으로 쓴다. 그리고 고전 11:14, "만일 남자에게 긴 머리가 있으면 자기에게 부끄러움이 되는 것을 '본성이' 너희에게 가르치지 아니하느냐"에서는 성격(character)의 개념으로 사용한다.


이런 면에서 바울에게 '순리(the natural)'란 오늘날과 같은 자연법 사상에 기초한 보편법(universal law)을 따라 행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공동체가 일반적으로 원하는 대로 행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따라"에 해당하는 파라(para)도 반대(against)보다는 "~외에 (beside)"라는 의미가 더 크다. 그러므로 "역리"란 자연법에 대한 대립이 아니라 일반적인 유형에서의 일탈(the atypical)을 의미하는 것으로, 사회적으로 스캔들일 수는 있으나 도덕적 정죄의 대상은 아니라는 입장이다.


탐색하는 자와 남색하는 자에 대한 세 가지 해석


마지막으로 살펴볼 부분은 바울 서신에 등장하는 '탐색하는 자(말라코이 Malakoi)'와 '남색하는 자(Arsenokoitai 아세노코이타이)'에 대한 해석이다(고전6:9-10,딤전 1:9-10).


돕슨을 비롯한 근본주의자들은 이 본문들을 인용하여 동성애자는 심판의 대상인 불의한 자들 중 하나임을 강조한다. 고린도전서 6장9-10절에서는 하나님나라 유업을 받지 못하는 불의한 자들의 목록(음행, 우상숭배, 탐색, 남색, 도적, 탐욕, 술 취함, 모욕, 속여 빼앗음) 가운데 '탐색하는 자', '남색하는 자'가 들어가 있다. 그리고 딤전1:9-10에서 심판의 율법이 누구를 위해 있는 것인가라는 질문에 이 '남색하는 자'가 들어있다. 그래서 탐색과 남색은 동성 행위를 통한 성적 타락으로 율법에 의한 심판의 대상이 되기 때문에 피해야 할 도덕적 타락으로 이해한다.


복음주의자 헤이스도 이들이 불순종하는 자들 중, 한 부류로 언급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고 본다. '탐색하는 자'란 동성행위에 참여하는 '수동적인 파트너'로 '어린 소년(young boy)'을 지칭하는 당시 속어였다고 한다. '남색하는 자'는 히브리어의 "남자와 함께 누워있는 자(mishkav zakur)"에 해당하는 말로 레위기 정결법에서 금했던 종류의 동성 행위자를 말하는 헬라어 신조어였다고 한다. 이 부류의 사람들은 율법이 없고 불순종하는 자들 중 하나로 채택되고 있다.


헬미니아크는 이 본문의 주된 핵심은 동성애 자체가 아니라 성의 남용이 문제라고 강조한다. '탐색하는 자'는 일반적으로 부드러운, 여성적인 남성을 가리키는 단어로서 윤리적으로는 나사가 풀린 듯한 남성, 자기통제가 잘 안 되는 남성을 가리킨다고 본다. 그리고 막대한 재정 손실을 초래하면서까지 개인의 즐거움에 빠진 사람들을 가리킨다. 또한 돈을 벌기 위해 남성간의 성교에 자신의 몸을 파는 "여성스러운 소년"을 지칭한다.


'남색하는 자'는 남자나 여자와의 성관계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하는 남자를 가리킨다. 그래서 남자나 여자에게 자신의 몸을 파는 남자, 특히 돈 많은 부자 노인의 재산을 물려받기 위해 그 노인을 몸으로 부양하는 남자 매춘부를 말하기도 한다.


정리하자면, '탐색하는 자'는 자신의 몸을 파는 남자 매춘부 중 수동적인 역할을 하는 쪽을, '남색하는 자'는 능동적인 역할을 하는 남성을 가리킨다. 즉 이 본문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동성애 자체가 아니라 매춘행위와 아동 학대라는 것이다.


자기주장 위해 성경 인용할 때 적합한지 물어야


이상의 성경 본문들에 대한 다양한 해석들을 접하면서 이 본문들이 정확히 오늘날 논란이 되는 성 정체성으로서의 동성애(Homosexuality)에 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인지에 대한 질문이 생긴다.


즉 현실의 어떤 현상을 비난하거나 옹호할 때 인용하는 성경의 본문이 개념적으로나 내용적으로 적합한 것인지에 대한 질문이다. 동성애에 관한 성경적 관점을 찾는다고 할 때 주의해야할 대목이라 생각된다. 또한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이 직접 언급하고 있지 않거나, 성경이 언급하고 있어도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큰 비중을 두고 다루지 않는 이슈들에 대하여 우리는 어떤 규범을 세울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마지막으로 동성애에 대한 생물학적·사회적·심리적·문화적 고려 없이 특정 성경 구절을 유추 해석하여 이 주제에 대하여 완결된 윤리적인 판단을 내세울 수 있나하는 점이다. 이런 질문에 긍정 혹은 부정의 입장에서 답을 찾아가면서, 다양한 삶의 방식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과 어떻게 함께 살아갈 수 있는지에 대한 길들이 찾아질 수 있기를 기대한다.


천진석 / 남가주 살림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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