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신앙과 영화'  5월 세미나 안내입니다.

시간: 2011년 5월 2일(월) 오후 7시
장소: 기독교세계관네트워크 사무실
영화: 마틴 기어의 귀향
발표자: 천진석 동역자

당일날, 코리안복지센터의 이지연 관장님이 "자살방지 교육"에 관한 프로그램을 안내하는 시간을 가질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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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세계관네트워크가 주관하는 제 9차 '4복음서 비교 성경공부'가 5월부터 매주일 1회씩 10주간 진행됩니다. 정원은 10명입니다. 등록을 원하신 분은 이메일이나 전화 (949-981-7294)로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시작 시간: 5월 4일 (수) 오후 7시-8시 30분  
장소: 기독교세계관네트워크 사무실
        7212  Orangethorpe Ave #7, Buena Park, CA 90621
회비: 50불 (자료 복사 및 간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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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의 진정한 즐거움은 어떤 제목을 가지고 기도하다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기도 제목이 바뀌고 나중에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으로만 채워지는 경험을 하는 데 있다. 목적을 가지고 매달리지만 존재의 소중함을 깨닫고 결국에는 기쁨에 넘치는 감사기도를 하게 되는 것이다. 공부 잘 하는 자녀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지만, 내 옆에 함께 있는 예쁜아이들로 인하여 감사하게 된다. 왜 나에게는 집도 없고, 친구도 없냐고 푸념을 늘어놓지만, 내가 집 없는 사람들의 친구가 되고, 외로운 사람들의 친구가 되게 하신 은혜에 감사하게 된다.


우리는 필요한 것과 소중한 것을 혼동하며 살 때가 많다. 마태복음은 예수님을 ‘임마누엘’이라 전하고 있다. 늘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손길로서의 예수님. 사랑한다는 것은 함께 하는 것이다. 기쁨도 슬픔도 즐거움도 고통도 함께 나누는 동고동락의 사랑이 소중한 것이다. 필요한 것만 추구하는 삶은 결국 이기적인 삶으로 떨어지고 만다. 예수님을 찾아왔던 부자 청년은 자신의 요구에 따라 예수님을 만나고자 했다. 결국, 존재의 사랑을 원하는 예수님의 말씀 - 너의 모든 소유를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주고 나를 따르라-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어쩌면, 그는 알라딘의 램프에 등장하는 지니와 같은 하나님을 찾고 있었는지 모른다. 나의 필요를 채워주는 수단으로 하나님을 찾으면, 결국 그 풍요로운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지 못한다. 그냥 하나님과 함께 하는 그 즐거움과 기쁨이 충만할 때, 나의 필요도 변하게 된다.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바로 알게 된다는 것이다.


기도 자체가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깊게 발전시키는 영적 행위이다.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은 성령을 구하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 자체를 구하는 것이 기도이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창조의 경륜과 역사의 섭리를 느끼며, 그 아름다움에 전율을 느끼는 영성이 기도의 영성이다. 그런 가운데 하나님만으로 만족하는 진정한 영적 실체로 거듭나는 자신을 발견한다. 이것이 기도의 은혜이다. 그리므로 기도는 호흡과 같은 것이다. 하나님과의 관계 가운데 존재의 원동력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기도가 없다면, 너무나 추상적인 모호한 하나님의 형상만 갖게 된다. 이런 기도가 없다면, 너무나 물질화 되어버린 바알 같은 하나님의 형상만 갖게 된다. 그러나 예수님이 ‘아바 아버지’라 부르신 하나님은 바로 우리와의 관계 가운데 서로 있음으로 만족하는 사랑의 원천이시다.


요즘 교회개혁에 관한 대화가 여기저기서 진행되고 있다. 먼저 기도의 개혁이 있어야 교회개혁이 가능하다고 본다. 존재의 즐거움을 회복하는 신앙 가운데 교회 개혁이 있을 수 있기때문이다. 탐욕스럽고 배타적이며, 충동적이고 무례하며, 그럴듯한 미사여구 가운데 필요의 충족에 신앙의 사활을 건 기독교, 이 시대의 진정한 미신일 뿐이다. 존재함으로 만족하게 하는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자. 그것은 하나님 안에 온전히 거하고, 내 안에 오직 하나님만 살아 움직이는 것으로만 만족할 수 있는 소박하지만 진실된 영성의 회복인 것이다.


천진석 CWN 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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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한국에서 세계로 파송되는 선교사의 수가 2만 명이 넘어섰다는 보도를 접했다. 미국 다음으로 많은 숫자이다. 통계상으로 볼 때, 한국교회는 세계 선교를 담당하는 주역임에 틀림없다. 이런 위치 때문에 선교와 관련하여 타종교나 세속 언론으로부터 주목을 받고, 그 공격적인 자세와 방법에 대한 질타도 많이 당한다.

 

세계만방으로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행위 자체가 문제가 될 리 없다. 마태복음은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예수님의 지상 사명으로 끝을 맺고 있다 (28:19-20). 사도행전은 ”성령이 너희에게 내리시면, 너희는 능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에서, 그리고 마침내 땅 끝에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될 것이다“ 라는 예수님의 선교 사명으로 시작하고 있다 (1:8). 성경을 진지하게 묵상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선교적 삶은 그리스도인 삶의 본질임을 바로 알 수 있다.

 

문제는 그 선교의 개념을 너무 좁게 해석하는 데 있는 것 같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적인 삶을 포함한 모든 삶의 영역에서의 선교적 삶에 대한 비전과 실천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그 결과 인생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가정생활, 직장생활, 여가생활, 사회생활은 단지 선교의 수단이 되는 영역으로 남겨지게 된다. 그 삶 자체 가운데 하나님 나라의 실현이라는 비전이 구체화되는 열매를 보기 어렵게 된다. 전 삶의 영역 가운데 이루어지는 선교적 삶에 대한 교육도 미비하다. 그래서결국 선교란 일상 삶으로부터의 이탈이고, 분리된 ‘종교적’ 헌신 영역이 되고 만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가정이 무엇이고, 그런 가정을 어떻게 이루어 나갈 수 있는 지를 가르치고 열매를 맺어 나아가는 일을 지상 명령으로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직업의 태도를 갖추고, 그 뜻에 따라 실천할 때 주어지는 구원의 열매를 체험해 본 적이 있는가? 함께 살아가는 이웃과, 함께 공존하는 자연과 아름다운 교제를 이루어갈 때 맺어지는 하나님의 의와 사랑을 알고 있는가? 내가 속해 있는 공동체 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내 존재로 말미암아 그 구성원들이 화해와 평화의 관계로 변화해 가는 기쁨을 누리고 있는가? 

 

오늘날처럼 세계가 하루 생활권으로 들어간 시대에 “땅 끝”의 개념을 지리 개념으로만 이해할 수는 없다. 오히려 하나님의 손길이 닿지 않는 것처럼 여겨지는 모든 생활 영역을 포함한다고 보고 싶다. 선교란 특별한 소명을 받은 소수의 그리스도인들이 특수한 헌신을 하는 영역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의 삶의 자세를 말한다.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면, 무슨 일을 하며 살든지, 모든 삶 가운데 하나님 나라의 실현이라는 목적가운데 살아가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선교의 핵심은 사는 것이다. 

 

“공격적 선교”라는 단어는 그리스도인의 단어가 아니다. 모든 삶에서 소금과 빛으로 살아가는 것이 선교적 삶이라면, 그리스도인의 삶은 섬기는 것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그리고 우리가 기대하는 결실은 하나님의 나라이다. 하나님이 주체이시고, 목적이시고, 방법이신, 그런 나라의 실현을 기대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교적 삶이란 하나님이 역사하는 길을 잘 따라가는 것이다. 이 시대에 세계만방에서 하나님이 구원을 위해 행하시는 손길을 잘 알아차리고, 그 역사에 동참하는 것이 선교이다. 오늘날 가정에게 주는 하나님의 음성은 무엇인가? 오늘날 직업 가운데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은 무엇인가? 우리들의 나라와 사회에 주어진 하나님의 요청은 무엇인가? 오늘날 각 지역에서 들려오는 을부짖음이 무엇이고, 우리는 여기에 어떻게 응답하고 있는가? 모든 삶의 영역에서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을 잘 듣고, 기쁨으로 따라가는 것이 선교의 삶이다.

 

천진석 목사 (CWN 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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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번 세미나 주제는 "인간의 역사를 재현하는 영화의 세계관 이해" 입니다.
4월 모임은 "코리안복지센터" 강의실 (기독교세계관네트워크 사무실 옆 건물)에서 열립니다. 
장소를 제공해 주신 이지연 관장님께 감사드립니다.

시간: 4월 4일 (월) 오후 7시 - 8시 30분
장소: 코리안복지센터 강의실
7212 Orangethorpe Ave #8, Buena Park, CA 90621
영화: 황산벌 (이준익 감독, 한국 영화, 코메디, 2003)
발표자: 서명석 형제

일정:
7:00 - 7:15  기독교세계관과 영화세미나 재요약 (천진석)
7:15 - 7:45  발표 (서명석)
7:45 - 8:30  토론 (이은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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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 확신과 이해 가운데 행동하는 꼴레

 

 영화에서 인상적인 것은 꼴레의 말뿐만 아니라 그녀가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태도이다.꼴레는  당당하고 거침없이 불의에 맞선다특히 가치전도의 주범이라   있는 남성원로들과 여사제들에 대하는 의연한 태도에서 예수가 성전청소를 행하던  기개가 느껴진다그리고 피해를 입은 여성들에 대한 한없는 용납과 보호가 잔잔히 그려진다여성할례는 종교적으로도전통적으로도 정당화될  없는 악행임을 일관되기 표현한다꼴레의 딸이  나를 할례하지 않았냐는 질문에 그녀는 당당하게 말한다.: “알라는 위대하셔네가 ‘빌라코로’임을 부끄럽게 느끼지 알았지생식기 절단(genital mutilation) 악한 짓이야‘빌라코로’는 좋은 부인이고 좋은 엄마란다. 

 

 

             b) ‘물라데’의 연대와 해방공간

 

꼴레네 집의  명의 부인들은 서로 싸우지 않는다그리고  부인을 중심으로 초지일관 꼴레를 지지한다그리고 여사제들이 몰려왔을 때나 꼴레가 끌려가 채찍을 맞을  그녀의 뒤에 버티고 서서 변함없는 지지를 표현한다이런 행동 때문에 원로들이나 여사제들이 꼴레를 함부로 다룰  없게 된다연대를 통하여  여성의 버팀이 힘을 얻게 되는 것이다동시에 꼴레의 집은 해방공간이다. 이곳을 찾은 소녀들은 보호함을 입고함께한 여인들은 자유함과 편안함이 있다그리고 유대감을 얻게 된다그리고 함께 축제의 춤을 춘다꼴레 말을 듣지 않고 몰래 딸을 빼내가 할례를 받게  결국 죽게  여인의 처절한 통곡에 여인들이 함께 운다그리고 자기의 갓난아기를  어미에게 내어준다서로가 서로의 자녀들이요어머니들임을 선언하는 행동이다연대가 절정에 이르는 장면이다.

 

물라데 통하여 형성된 해방공간은 기존의 억압적 현실을 근본적으로 뒤흔드는 탈중심화의 공간이요 대항 헤게모니를 창출할  있는 공간이그래서 이런 공간을 통하여 서로의 의식화불의한 상황에 대하여 ‘아니오’   있는 시각과 용기평등한 존재에 대한 확신구체적이며 역사적인 공간에서의 실천적 평등성에로 연결을 지향해 나갈 여성해방의 길이 열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 공간이 바로 교회가 되어야하지 않나 생각한다.

 

    

              c) 변화되는 남성들

 

남성들 중에 서서히 서로 다른 계기로 암묵적이든 명시적이든 꼴레를 지지하는 자들이 등장한다흥미로운 인물은 장사꾼이다그는 전직 유엔 파견 군인으로 바람둥이 장사꾼이다.그런데 채찍질을 하는 꼴레 남편에게 “그 여자는  부인이야!”라고 소리친다그리고 꼴레의 남편은  사건에서  충격을 받은 듯하다우유부단한 성품을 지닌 남편도 자신도 마음속에서 장사꾼의 외침을 끝없이 되뇌고 있었지만기존 질서의 ‘명령’에 따라 악행을 행하고 있던 자아가 깨어나는 순간이었다그는 자책감을 갖고 자신 집에 몰려든 여자들에게 공손하게 대한다“저 분도 많이 다쳤어."라고  여인이 말한다그리고 꼴레를 지지하고 가부장주의의 온상인 원로모임에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선다자신의 아들에게도 떠나라고 핀잔을 주면서그리고 꼴레 딸의 약혼자의 고뇌와 결단을 통해 가부장적 질서는  이상 새로운 남자 세대에게도 소망이 없음을 선언한다.

 

     

            d) 십자가의 저항

 

꼴레가 마을 사람들과 자기 딸이 보는 앞에서 남편에게 수없이 채찍에 맞는 장면은  영화의 클라이맥스다입을 열어 ‘물라데’를 취소하라는 외침에 아랑곳하지 않고 입을  다물고 신음소리조차 내지 않는 꼴레의 모습에 관객들은 눈물이   밖에 없다그러나 맞으면서도 당당하다쓰러지지 않고 끝까지 버틴다채찍질을 하는 남편의 영혼은 완전히 무너진다그의 낙담과 슬픔후회와 처절함이 얼굴에 베어난다그러나 꼴레에게는 무너질  없는 정의인애믿음승리의 형상이  몸을 통해 드러난다 순간 함께했던 여성들전통적인 가부장제도에 불편했던 남성들이 한마음이 된다꼴레 딸의 약혼자가 결혼을 반대하는 그의 부친에게 마지막에 말했던 것처럼 “이 시답지 않은 전제정은 끝났다!”고 몸으로 표현하면서.

 

 

           e) 전통과 종교그리고 안테나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모스크 사원 꼭대기에 놓여 있는  달걀과 하늘 높이 보이는 텔레비전 안테나이다달걀은 세네갈 전통신앙의 신적 출생을 상징하는 것인데이슬람 사원 꼭대기에 놓이면서 다시  마호메드를 기다리는 상징이 되었다그리고 안테나는 넓은 세상과 소통이 이루어지는 열린 문화를 상징하고 있다아프리카 전통과 기성 외래종교그리고 새로운 세계와의 만남을 통해 ‘물라데’의 역사가 펼쳐지기를 소망하는 셈벤의 기원이 담긴 장면이다셈벤은  영화를 통해 ‘물라데’라는 생명의 전통에 기초하여 폭력의 전통을 넘어서고기존의 외래종교를 새롭게 해방종교로 변모시키고세계의 문화를 주체적으로 수용할 있는 꿈을 펼쳐보고 있다그래서 아프리카의 세네갈이 진정한 인간해방의 땅이  있다는 확신을 드러내고 있다.

 


맺는 

 

‘물라데’는 단지 아프리카 세네갈의 이야기가 아니다 영화가 그리고 있는 문제의 가부장적 질서와 이데올로기는 그야말로  세계의 역사요 현실이다물론  양상은 지역과 문화마다 다를  있다그러나  원리는 동일하게 작용한다여성 억압과 인간성 말살이 그것이다여성 할례라는 악행이 가치전도에 의하여 정결한 의식으로 변모하는 현실이 적나라하게 고발되고 있는 작품이다.

 

셈벤은 아프리카의 여성해방운동 서양의 여성해방운동 구별시키려 했다그것은 삶의 자리의 차이에서 비롯한 문화적 가치의 다양성에 대한 인식에서 출발한다셈벤은 아프리카 사람과 땅의 독특성을 그대로 간직한 여성해방운동 제시하고 있다그는 자신들의 전통 안에서 ‘물라데’를 찾았다그리고  ‘물라데’의 재생과 확장을 통해 아프리카 여성해방을 꿈꾸었다그리고 이런 작업을 통해 아프리카 여성들이 자신의 역사에 대항하면서 동시에 화해할  있는 길을 제시할  있었다.

 

셈벤이 그리고 있는 꼴레라는 체제 저항의 여인은 예수의 십자가와 만난다그녀가 채찍에 맞을  함께 했던 사람들이 모두 매를 맞았다그녀의 수치와 고난은 모두의 수치와 고난이었다그러나 그녀의 버팀과 정의의 수호는 함께하는 사람들이 변화되는 강력한 능력이었다꼴레는 정죄의 심판보다는 변화의 구원 택했다억압받던 여성도불의하게 억압하던 남성도하나님의 형상가운데 각자의 개인을 존중하는 진정한 개인주의요 공동체주의를 실현하는 길로 나아갔다. 예수의 인간해방운동과 만나는 점이다.


(천진석 CWN 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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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 가치전도의 극치

 

역사적으로 종교는 부자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포로된 자를 노예로 만들고, 사람들을 소외시키고, 억눌린 사람들의 생명을 빼앗는 지배 이데올로기 역할을 때가 많았다. '물라데' 바로 그런 종교의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종교는 여성의 성욕을 억누르고 가부장적 사회에 예속된 재산으로 붙들어두기 위해 오랫동안 시행해온 '여성할례' 비인간성을 신의 이름으로 정당화한다. 그리고 폭력적인 행위를 "정결" (purification)이라 부른다. 무엇으로부터의 "정결"이란 말인가? 태어날 때부터 여성은 "저주" 받았다. "저주" 키가 여성의 성욕이다. 성욕 때문에 남성이 유혹받고, 가정이 파괴되며, 사회가 혼란에 빠진다. 그러므로 '할례' 여성을 살리고, 남성도 살리고, 궁극적으로 사회를 살리는 거룩한 의식이라는 주장이다. 그리고 그런 행위는 종교의 경전에 있는 문자로부터 정당화된다. 신의 말씀이 보장하는 것으로, 신의 뜻으로 거룩한 의식이 된다.

 

이런 "정결" 의식인 여성 성기 부분 절단을 시행하지 않는 여성이나 가족은 신성모독자들이다. 그들을 "빌라코로"(Bilakoro) 부른다. 말은 경멸과 조롱, 더럽고 추한 집단을 지칭하는 차별언어이다. 성경에 자주 등장하는 "사마리아인," "이방인"이란 말과 비슷할 것이다. 비인간적인 행위와 종교적 권위주의에 대항하여 인간 본연의 몸을 지키려는 여성에게 붙여지는 차별언어인 것이다. "정결"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절단의식이 사실은 몸을 더럽히고 죽이는 반생명적인 행위라는 사실을 바로 알고 이를 단호하게 거부하는 사람들이 "빌라코로" 낙인찍힌다. 이런 가치전도의 가부장적 사회의 모습이 너무나 적나라하게 그려지고 있다.

 

 

      b) 가부장적 질서를 내면화한 여성들의 비극

 

영화에서 꼴레가 선포한 ‘물라데’에 가장 격렬한 반응을 보이는 집단이 여성 사제들인 살린다나집단이다. 전통적으로 어린 소녀들의 ‘할례’를 행하는 자들이 이들이었고, 이들은 권력집단으로 남자 장로들과 함께 가부장적 사회를 지탱해가는 지배계층이다. ‘살린다나 전통과 종교의 이름으로 자신들과 동일한 여성인 꼴레를 불결한 여인으로 정죄한다. 그리고 꼴레에게 몰리는 여성들의 인심을 차단하기에 안간힘을 쓴다. 원로 여성 사제는 꼴레가 자신들의 권위에 도전하기 때문에 그녀를 파멸시키겠다고 천명한다.

 

대목은 가부장적 질서를 내면화하는 여성들의 문제를 분명하게 그려준다. 영화‘물라데’는 여성들 스스로 가부장제 질서의 피해자이면서 어떻게 공모자가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는 영화이다. 여성은 생존의 테크닉으로 가부장제 질서에 순응하게 되었다고 있다. 여성 스스로 가부장주의적 가체를 내면화하여 '여성 혐오 사상' 물들게 되거나 남성중심적 제도 가운데 생존 기술의 반복적 학습을 통하여 스스로를 가부장적 기준과 범주들에 맞추게 것이다. 여성 스스로 열등성을 내면화하여 가부장제적인 억압자의 표상을 스스로 속에 각인하고만 뼈저린 상황이 영화에서 너무나 사실적으로 그려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진정한 여성 해방을 위해서는 '남성은 가해자/여성은 피해자'라는 가부장제적 권력에 대한 흑백논리적 단순 이해를 넘어 여성들간에도 권력관계가 발생한다는 인식이 필요하다.

 

 

        c) 가부장적 질서에 대항하는 꼴레의 고난

 

명의 소녀들을 집에 보호해주고 ‘물라데’를 선포하여 기존의 가부장적 질서에 맞서는 꼴레에 대한 비난 내용을 경철할 필요가 있다. 소녀들의 엄마들이 꼴레를 “선동가”로 매도한다. 부인의 아들이 꼴레를 “미친 년”이라고 욕설을 퍼붓는다.  남편은 “내 머리 꼭대기에 앉은 년”이라고 힐난한다. 마지막으로 마을 원로가 “너는 사탄!”이라고 정죄한다. 순진한 소녀들의 마음을 훔쳐 사회부적응자로 몰고 가는 여자라는 비난이다. 기존의 체제에 도전하여 자신과 가족을 위험에 빠뜨리는 정신 나간 여자라는 비난이다. 그리고 가부장 질서의 중심인 남편을 무시하는 교만한 여자라는 비난이다. 그리고 종교적으로 구제받을 없는 악한 영에 사로잡힌 여자라는 정죄인 것이다. 영화는 주인공 꼴레를 향한 기존의 가부장적 질서에 순응을 거부하고 인간해방으로 나서는 여성들에게 붙여지는 주홍글씨가 무엇인지를 그려내고 있다.

 

 

         d) 끝없는 속죄양의 창출

 

우물에 몸을 던져 자살한 아이들의 주검을 놓고 마을 남자 원로들이 서로 책임 공방을 벌인다. 일차적 책임이 라디오란다. 전통문화를 파괴하고 신서양문화를 전달하는 라디오 때문에 여성들이 이상 고분고분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라디오를 압수하여 불에 태운다. 다음으로 모든 분란이 꼴레 때문이라고 절규한다. 그리고 기존 질서를 지탱하는 원로들이나 여사제들이 이상 질문할 필요 없이 이런 비난에 완전히 동의한다. 원로는 노골적으로 아이들의 자살이 자신들의 탓으로 돌아올 것이 두려워 ‘속죄양’이 필요하다고 제안한다. 물론 꼴레를 지목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사악한 행동에 어떤 원로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그리고 채찍으로 꼴레를 때리던 남편의 채찍을 빼앗은 도시에서 장사꾼을 살해함으로 자신들의 경건한 체제를 뒤흔드는 외래문화에 대한 격한 적대감을 표출한다.


(천진석 CWN 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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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장자연님의 죽음과 관련된 불의한 지배구조에 대한 분노가 빗발치고 있습니다. ''여성의 ' 보내며 아직도 우리 사회에 만연한 성차별문화에 대한 깊은 성찰이 있는 기회가 되기를 바라면서 주제와 관련한 아프리카 영화 한편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우스만 셈벤(Ousmane Sembene)물라데 Moolaadé’ (2004)

 여성해방운동을 비롯한 인간해방운동이 극복해야 하는 가장 끈질기면서도 완고한 전통이 가부장제적 질서와 이데올로기입니다. 가부장주의 세계관과 문화가 낳는 폐해가 무엇이고, 이를 어떻게 극복할 있는 지를 가장 명료하게 그려낸 영화중의 하나가 우스만 셈벤(Ousmane Sembene) 작품인물라데Moolaadé’ (2004)입니다. 영화는 아프리카의 소위 여성 할례가 가부장적인 질서 내에서 어떠한 가치전도를 가져오고 인간성을 말살하고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폭로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오래된 가부장주의 이념과 질서 가운데서도 질식되지 않고 살아남은 인간해방의 전통인물라데 앞세워, 아프리카인에 의한, 아프리카인을 위한 개혁을 주문합니다.


물라데 신학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모티브를 던져줍니다. 영화의 주인공인 꼴레(Cole)라는 인물을 통해 양보할 없는 정의의 실현이란 과제를 사랑이란 수단으로 어떻게 수행할 있는지에 대한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성의 단호함과 긍휼함을 통해 영화를 감상하는 사람들이 꼴레와 인격적으로 연대감을 갖게 되는 체험을 하게 해줍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가부장적 질서의 해체를 위해 예수의 십자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신학적인 질문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물라데영화 감상을 통하여 가부장적 이데올로기는 인간 삶의 가치전도를 가져와 건강한 인격체로서 살아가고자 하는 여성과 남성을 지배와 복종, 폭력과 순종이라는 구조 가운데 묶어버리는죽음 질서임을 다시 확인해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인간해방을 위한 연대의 중요성, 정의실현을 위한 일관된 입장 표명 행동의 필요성을 기독교 신학적 입장에서 재조명해볼 있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 천진석 총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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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세계관네트워크 2011 ‘신앙과 영화’ 세미나 (2) 2011년 3월 7일(월)

영화: 장미의 이름 (The Name of the Rose, 1986)

발표자: 오민석


1. 원작자/연출자

<움베르토 에코>

  1) 기호학자, 역사학자, 철학자, 미학자이면서 다양한 언어를 섭렵하고 있는 현시대 세계 최고의 이탈리아 지성인.

  2) ‘장미의 이름’은 움베르토 에코의 지식을 총 동원한 첫 장편소설.

  3) 대표작으로 ‘푸코의 진자,’ ‘전날의 섬’ 그리고 여러 이론서와 수필집들이 있다.


<장 자크 아노>

  1) 뤽 베송과 함께 프랑스를 대표하는 영화감독.

  2) 여러 장르를 다루었지만, 자연에 대한 환상 또는 인류의 역사에 초점을 맞춘 작품이 많다.

  3) 대표작으로 ‘연인,’ ‘불을 찾아서,’ ‘에너미 앳 더 게이트,’ ‘티벳에서의 7년’ 등이 있다.


2. ‘장미의 이름’을 알기 위한 배경 지식

  1) 윌리엄 수도사

책에 나오는 윌리엄 수도사는 1300년대 중세 철학자인 윌리엄 오캄(William of Ockham, 1285~1349)이라는 실존 인물에 기초하고 있다고 한다. 청년시기 프란시스코회 수도사가 되고, 옥스퍼드와 파리에서 강의했다. 논리학과 인식론에서 뛰어나며, 유명론(Nominalism)의 입장으로 중세의 사변신학 붕괴기에 근세의 경험론적 사상을 준비한 자로 평가된다.

  2) 윌리엄 오캄의 철학적 배경

    a) 오캄의 면도날 (사유의 경제원리)

‘더 적은 것을 가정해서 설명할 수 있는 것을 더 많은 것을 가정해서 설명한다면 헛된 일이다.’ 충분한 이유 없이 무언가를 참 이라고 믿어서는 안된다. 필연성 없이 실재를 증가시키는 것을 거부한다. 하지만 신과 관련해서는 ‘모순을 제외하고 신에게 불가능한 것이란 없다.’는 입장이다. 둥근 사각형, 결혼한 총각은 만들 수는 없지만 신은 우리가 알고 있는 물리법칙을 위반하는 일을 할 수 있다. 신의 입장에서는 필연적이고, 세상의 입장에서는 우연적이다. (임의성을 말하는 것은 아님)

    b) 유명론 (개별자 사이의 공통점은 오직 이름뿐, 보편자에 대한 부정)

사과와 소방차라는 개별자는 ‘빨갛다’는 보편자를 가지고 있다. 개별자의 존재는 분명하지만 시공을 초월해서 공유되는 보편자의 존재는 의심스럽다. 윌리엄은 논리학과 경험주의를 토대로 철학을 완성했지만 보편자를 거부한 이유는 보편자를 상정한 이론이 정합적이지 않았기 때문이지 보편자가 불완전한 개념이기 때문에 거부한 것은 아니었다.


  3)역사적 배경1

    a) 카노사의 굴욕

1077년 교황 그레고리 7세는 교회의 세속화를 막기 위해 황제 하인리히 4세와 성직자 임명권을 놓고 투쟁을 벌였고, 그 결과 황제 하인리히 4세는 파문되었다.

    b) 십자군원정

1096년부터 시작된 십자군원정으로 교황권은 왕권을 크게 압도, 하지만 200년 동안 계속된 십자군원정의 결과적인 대실패로 교황권의 약화와 봉건제의 붕괴를 야기했다.

    c) 아비뇽유수

교황 보나파키우스 8세는 황제 필립 4세와의 대립에서 대패, 아비뇽으로 유수를 당했다(1309-1377).

    d) 봉건제의 붕괴로 발생된 여러 유럽학파, 아랍 문화에 대한 재인식 -> 상업, 과학, 문화적인 측면의 큰 변화. 특히 아우구스티누스 이후로 플라톤에 의해 밀려났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서적들이 번역되기 시작했다, 플라톤 철학으로 해결할 수 없었던 신학의 많은 문제들을 아리스토텔레스를 통해 보안(토마스아퀴나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으로 신학을 다시 구성한 철학자)했다.

---신비주의에서 이성주의로 사상이 넘어가는 시기, 왕권과 교황권의 갈등의 시기---


  4) 역사적 배경2

    a) 1314년 바이에른의 루드비히가 프랑크푸르트의 다섯 독일 제후들에 의해 신성 로마 제국의 최고 통치자로 선출, 라인의 영주와 퀠른의 대주교가 프리드리히를 선출, 유럽의 황제가 둘이 되었다.

    b) 1316년 아비뇽에서 요한 22세가 교황의 자리에 앉게 되었다.

    c) 1322년 루드비히가 프리드리히를 왕권에서 끌어내리자 교황 요한 22세는 루드비히를 인정하지 않고 파문하였다.

    d) 1322년 5월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미켈레가 주축이 되어 개최한 페루지아 총회에서 ‘그리스도의 청빈’이 주장되고, 1323년 11월 교황 요한 22세는 프란체스코 수도회를 이단시 하였다.

    e) 1324년 루드비히 황제는 <작센 하우젠 선언>을 반포하며 교황 요한 22세를 이단으로 몰아 부치면서 (교황을 공격하기 위해)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주장을 지지하였다.

  

  5) 역사적 배경3 (서두의 시대적 배경)

    a) 1327 11월 말, 교황에 대적하기 위해 프리드리히와 다시 제휴한 황제 루드비히가 이탈리아 밀라노로 내려와 대관식을 거행하게 된 상황부터 이야기 시작한다.

    b) 페루지아 총회 이후 아비뇽으로 소환 명령을 받은 미켈레가 신변의 위험해지자, 프란체스코 수도회는 교황 측 사절단과 황제 측 사절단이 한 곳에 모여 사전에 협상하는 자리를 만든다. 프란체스코 수도회는 이 협상을 통해 양자의 실세를 서로 인정하고, 차후 교황 측으로 미켈레와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신변안전 보장까지 받으려는 의도였다.

    c) 이 첫 모임을 주선하기 위해 선발된 사람이 황제 루드비히의 직속 신하이고 아드소의 아버지와 친구인 윌리엄 수도사였다. 수도사 로저 베이컨으로부터 경험론 철학을 사사 받은 명석한 수도사이다.

    d) 윌리엄 수도사는 황제와 교황의 사이에서 중재자 역할을 담당하고 있던 베네딕트 수도회의 한 수도원을 선정하여 회합 며칠 전 문제의 수도원에 먼저 도작.


3. 장미

장미는 색에 따라 다르지만 모두 사랑에 대한 의미를 갖고 있다. (붉은 장미-정절, 열렬한 사랑, 흰 장미-존경, 사랑의 탄식, 노란 장미- 질투, 부정한 사랑, 분홍 장미- 사랑의 맹세, 들장미- 짝사랑)

  1)신에 대한 사랑 (어떠한 방식으로 보여지든지 신적 존재에 대한 열망은 공통분모)

    a) 윌리엄 수도사

‘선을 식별하는 지식이 인간의 의지를 결정하기에, 올바른 지식이 없이는 바른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의지의 자유를 가질 수 없다.’

윌리엄은 자신이 가진 방대한 지식과 체계적인 논리와 이성으로 신앙체계와 신앙을 이루고 있는 체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발견된 모순과 불의에 맞서려 했지만, 지성이 모순을 이길 수 없는 세계에 지적 절망을 마주하게 된다.

    b) 호르헤 사서관장

웃음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서책을 죽음과 맞바꾸어서라도 감추려고 한 인물, 신앙인의 탈을 쓴 악마 같은 인물, 호르헤의 행동은 아우구스티누스적 신학을 바탕으로 오랫동안 자신의 명예와 가치관을 정립시켜준 베네딕트 수도원에 대한 미련과 고집뿐 아니라, 자신의 진리에 대한 또는 신에 대한 확고한 신념에 의한 것일 수도 있다.

    c) 우베르티노 원장

사회지도자의 책임에 눈을 뜨고 수도원 외적인 행위를 하다 발각되어 졸지에 마녀사냥을 당하지만 그는 결과보다는 동기의 중요성을 설파하면서, 그 나름대로의 진리에 대한 신념과 옳은 일에 대한 정담함을 나타내었다.

    d) 아델모와 그 외 죽은 수도사들

감추어진 진리의 이면을 찾고 괴로워하고 더 알기 원하는 젊은이들. 진리는 찾는 사람이 있기에 더욱 존재가치가 드러나고, 이 들은 의도했든 하지 않았든 한 발짝 더 내딛는 길이 신에 대한 확신으로 데려다 줄 것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2) 인간에 대한 사랑

    a) 아드소

순간적인 육체적인 유혹에 수도사로서의 자격을 박탈당할 만한 사건을 만들어냈지만 그는 사건을 통해 진정한 진리와 신앙이 무엇인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하는 기회, 스스로 반문하고 회의함이 오류에 빠지지 않도록 이끄는 길잡이가 되도록 했다. 계율을 파기했지만 그 원인은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의 순수한 사랑이었다.

    b) 윌리엄 수도사

아드소의 고백에 윌리엄은 한 번도 겪어보지 못했던 인간적 사랑의 존재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수도사로서 교육받아온 그의 이성으로는 육체적 욕망은 저주와도 같은 것이지만, 결국 사랑이 없다면 세상은 지루해질 것이라는 보편적이지만 논리적인 입장에 이르게 된다.


4. 이름

  1)인식의 과정

인간은 ‘장미’라는 이름을 통해서 장미를 인식하고 받아들인다. 그 기호 없이는 장미 그 자체를 인식 할 수 없다. 결국 이름과 인간 사이에는 거대한 기호의 다리가 존재하고 있고, 발전시켜서 영화의 핵심 기호인 장미(사랑)는 인간이 세상을 인식하는 중요한 다리를 의미함을 알 수 있다.

  2)그녀의 이름

이름은 사물의 존재를 완성한다. 아드소가 평생을 잊지 못하고 감사함과 죄책감으로 살아가게 되는 결정적인 요인인 그녀. 그러나 아드소는 정작 그녀의 이름을 알지 못한다. 자라온 환경과 모습과 숨결 하나하나, 꿈 속에서까지 또렷하지만, 아드소의 기억 속 그녀의 완성은 그녀의 이름을 통해 이루어진다.


5. 결론

각 시대마다 그 시대를 지배하는 집단이 있고, 그 집단이 추구하는 (혹은 이해관계에 있는) 방향 혹은 핵심철학이 있다. 그리고 이 들은 언제나 그랬듯이 영원하지 않다. 그래서 인류는 항상 그 치열한 과도기의 연속 안에서 진화한다. 하지만 각기 다른 시대의 철학 속에는 기본적인 공통분모가 존재한다. ‘신(진리)을 사랑하여 신(진리)을 닮기 위해 신(진리)에 대해 연구하고 고민하고, 그 결론에 따라 살아간다’는 것. 아직도 인류는 신(진리)을 닮아가는 과정 위에 놓여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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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들이 동성애를 성경적 관점으로 이해하려는 시도는 지극히 당연하다. 왜냐하면 성경은 그리스도인의 신앙 규범과 실천을 형성하는 원천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성경은 성경을 읽는 사람의 신학적 관점에 따라 서로 다른 해석 방식으로 이해되고, 따라서 본문의 의미도 다르게 파악되기 마련이다.


일반적으로 근본주의자는 성경은 하나님의 직접 계시로 기록된 책으로 문자나 내용에 한 점의 오류도 없기 때문에 성경 본문을 시공을 초월하여 동일하게 적용할 수 있다고 믿는다. 존 스토트를 비롯한 복음주의자들은 성경을 하나님의 계시가 성경 저자들의 인격과 문화를 통해 전해진 '이중저작물'로 여긴다. 그들은 성경을 현재에 적용하기 위한 재해석은 필요하나, 규범상 오류는 없다고 믿는다. 반면에 자유주의 해석을 따르는 사람들은 성경은 시대의 문화와 상황에 따라 해석된 하나님 신앙을 집대성한 책으로 문자, 내용, 규범에 있어서 현재적 관점으로부터 재해석되어야 한다고 본다.


제임스 돕슨, 리챠드 헤이슨, 대니얼 헬미니아크


   
 
  ▲ 제임스 돕슨.  
 
그러므로 동성애에 대한 성경적 이해도 이런 신학적 입장에 따라 해석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창세기 19장에 등장하는 소돔의 악행에 관한 해석을 보자. 포커스 온 패밀리(Focus on Family) 운동을 이끌고 있는 제임스 돕슨(James Dobson)을 비롯한 많은 근본주의자들에게 소돔 이야기는 인간의 죄악과 하나님의 심판을 상징하는 좋은 본보기이다.

그리고 이 소돔을 멸망으로 이끈 대표적인 죄악 중의 하나가 동성애였다고 본다. 19장 5절에 등장하는 "상관하다"(yada, to know)라는 말이 바로 동성애 행위를 가리키며, 그래서 소돔에서 유래한 영어의 Sodomite 자체가 변태적인 성교를 지칭하는 동성 행위를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그리고 에스겔서 16장에서 소돔의 죄악들을 열거할 때, "가증한 일" (abomination)을 언급하고 있는데(50절), 이것이 바로 동성애를 말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레위기 18장 22절에 동성애를 동일한 "가증한 일"로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신약성경의 도덕적 비전> (The Moral Vision of New Testament)의 저자인 리챠드 헤이스(Richard B. Hays)를 비롯한 복음주의 입장에 있는 학자들은 대체로 소돔의 주요 죄악이 동성애보다는 사회적 불의에 있었음을 강조한다.


에스겔서에 따르면 분명히 소돔인의 동성애 행위는 "가증한 일"로 정죄되고 있으나, 그들의 주된 죄악은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도와주지 않은 것이었다(겔 16:49). 그리고 예수님이 소돔의 죄악을 말씀할 때, 하나님의 사람들(천사들)을 영접하지 않은 것만 언급되고 있지 동성애는 언급이 없음을 상기하고 있다(마10:5-15).


즉 성경은 소돔인의 동성애 행위는 악행으로 보나 그것이 소돔의 죄악을 대표하는 죄는 아니라는 것이다. 헤이스는 성경에 동성애 관련 내용은 6회 정도 등장하지만, 반면에 경제적 불의에 관한 내용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이 등장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자유주의 혹은 진보주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는 대니얼 헬미니아크(Daniel Helminiak)는 <성경이 실제로 동성애에 관하여 말하고 있는 것>(What the Bible Really Says about Homosexuality)에서 소돔의 죄악은 무정한 문전박대(Inhospitality)에 있었다고 말한다. 소돔 사람들은 나그네에게 무정하고 잔인했다. 그래서 낯선 나그네들을 '강간(rape)'하려 했다. 혹은 이 수상한 사람들을 심문하려 했다. (그는 "상관하겠다"로 번역된 야다 yada를 왜 그냥 문자적으로 '안다'로 이해하면 안 되냐고 반문한다. 이 단어가 구약에 943회 등장하지만 단지 10회만 성적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성관계가 아니라 심문이란 뜻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고 말한다.)


당시 문화에서 남자에게 최대의 모욕은 여성처럼 취급당하는 것이었다. 즉 남성은 늘 관통(to penetrate)의 주체가 되어야 하는데, 수동적으로 관통당하는(to be penetrated) 자로 만들어버리려 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소돔 이야기에서의 초점은 동성애가 아니라 성폭력이다.


그리고 에스겔서의 "가증한 일"은 일차적으로 에스겔서의 맥락에서 해석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본문의 전후맥락을 보았을 때, "가증한 일"은 동성애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간음(adultery)’, ‘매춘(harlotry)’과 관련된 것이다. 즉 우상숭배를 가리키는 것이다. 하나님을 향하여 신실하지 못하고, 신성모독을 일삼고, 아이들을 우상 제물로 바치고, 사람을 죽이는 행동을 정죄한 말씀이라는 해석이다.


레위기의 ‘가증한 일’에 대한 세 가지 관점


   
 
  ▲ 리처드 헤이스.  
 
이와 관련하여 레위기 18:22에 등장하는 "가증한 일(abomination)"에 대한 해석들을 살펴보자. 근본주의적 보수주의 입장에 볼 때, 동성애 행위는 윤리적 차원을 넘어선 창조 질서 (성, 가족)를 파괴하는 행위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백성이 지녀야할 정결을 더럽히는 행위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자를 "반드시 죽이라"고 했다(렘20:13). 오늘날 예수님의 아가페 사랑의 정신에 따라 문자대로 실행하지 않지만, 동성애가 얼마나 하나님이 미워하는 행위인지를 인식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일반적으로 복음주의 입장도 레위기 본문을 통해 동성애가 하나님 보시기에 "가증한 일"이라고 이해하지만, 동성애를 가증스러운 것의 대표로 내세우지는 않는다. 이 본문을 보면, 간음, 근친상간, 수간 등의 죄들이 열거되어 있다. 그중에 동성애는 이방 종교행위와 연관된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가증한 일"로 분류되고 있다고 본다.


그리고 이 본문이 등장하는 전후 맥락이 신약성경의 시각에서 보면 이미 폐기된 정결법 중에 포함되어 있음을 지적한다.(할례, 음식 규정 등) 그러나 신약성경이 적은 분량이지만 동성애를 일관되게 부자연스러운 성행위로 규정하고 있기 때문에 죄로 이해하고자 하는 입장이다. 즉 유독 동성애 문제만 "가증한 일"로 침소봉대 하지 않는 가운데 여전히 죄로 인식하고자 하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자유주의 입장의 헬미니아크는 이 본문의 주제가 윤리와 구분된 특수한 종교적 정결법 상의 금지법(taboo)이었다고 본다. 그리고 이 금지법을 어긴 사람을 극형에 처하는 이유는 가부장적인 족장 사회를 견고히 유지하려는 의도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동일한 맥락에서 부모를 저주한 자, 간음한 자를 사형에 처하라고 한 것을 보면 이를 알 수 있다. 또한 당시대인들이 "종의 섞음(mixing of kinds)"을 불결한 것으로 이해하는 세계관 (레위기 19:19, 신명기 22:11)에 따라 이미 고정된 종의 변형을 금지하는 차원에서 이 금지법이 주어진 것으로 본다. 이런 금지법은 근본적으로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정결법이 일환이었다.


이 문제가 오직 레위기에서만 논의되고 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구약성경에서 유일하게 동성 간의 성행위를 문제 삼는 정결법이 특수한 시대의 금지법이었고, 예수님과 제자들이 이 정결법을 문자적으로 지키기를 부정했으므로, 더 이상 신약성경을 통해 동성애를 정죄할 근거를 찾을 수 있으리라 기대하면 안 된다고 주장한다.


특히 헬미니아크는 "가증한 일"이란 단어의 언어 분석을 통해 이 말은 죄와 결부된 단어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여기서 사용된 히브리어 '토에바(toevah)'는 부정함, 더러움, 타부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한다. 도덕적인 의미에서 불의나 죄를 가리키는 단어는 '찌마(Zimah)'였다. 그래서 헬라어 오십인역에서 이 단어를 브델리그마(bdelygma), 즉 '제의적 범법(ritual offense)'으로 해석했다. 헬라어에서 도덕적 정죄를 가리키는 범법(anomia), 악행(poneria), 불경건(asebia)이라는 단어들이 따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단, 에스겔서 16장에서 소돔의 악행인 부도덕성과 우상숭배를 말할 때, 윤리적 죄의 개념인 아노미아(anomia)로 번역하였다. 레위기에서 "가증한 일"로 번역된 부분은 윤리적 죄가 아니라 당시 이스라엘의 특수한 민족적 종교법을 준수하지 않은 것에 대한 정결법상의 판단이라는 해석이다.


바울의 동성애 언급에 대한 세 가지 해석


   
 
  ▲ 대니얼 헬미니아크  
 
신약성경 로마서 1장에서 바울이 언급한 동성애 관련 부분도 신학적 입장에 따라 해석이 달라진다. 동성애가 성을 "역리로(para physin)" 사용하고 있다는 비난(롬1:26-27)에 대한 해석이 그 핵심이다.

근본주의 입장은 바울이 동성애는 우상숭배 결과로 빚어진 인간 타락의 대표적인 것으로 보았다는 의견을 피력한다. 그래서 하나님을 떠나 우상숭배에 빠진 인간의 타락상을 열거하는데 특히 동성애를 부각시켰다는 것이다. 26절에 "내어버려두사"라고 표현할 만큼 구제받기 힘든 죄악이라는 것이다. "역리로(para physin)" 쓴다는 것은 창조 질서에 반하는 행위를 일컫는 말이다.


복음주의권 학자인 헤이스도 바울이 동성애를 우상숭배 결과로 빚어진 인간 타락 중 하나로 보았다고 해석한다. 하나님을 떠난 인류의 도덕적 상태를 보여주려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내어버려두사"라는 말씀은 인간의 타락이 하나님 진노의 이유가 아니라 결과임을 강조한다. 즉 이 말씀은 윤리적 정죄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타락한 인간 실존의 상태를 전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유독 왜 동성애인가? 그것은 동성애가 하나님이 창조 질서를 왜곡시키는 방식에 관한 이미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동성애야 말로 창조주로부터 멀어진 인류의 비극적 혼동과 소외의 자명한 증거라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동성애 행위는 죄악의 결과이지만, 특별히 다른 죄악이 비해서 더 비난 받아야 할 죄는 아니다.


헤이스는 "자기 의로 동성애를 판단하는 것은 동성애 행위 자체만큼이나 죄악된 일"이라고 말한다. 이 바울의 본문은 유대인이나 이방인 모두 의로우신 하나님의 공정한 심판 아래 똑 같이 정죄 받고 있음을 선언하고 있다는 것이다.


헬미니아크는 바울이 언급하고 있는 동성애 행위는 윤리적 타락과 구분된, 당시 사회 관습에 반하는 문제였다고 본다. 즉 바울은 우상숭배의 결과를 성의 문제와 윤리적 타락, 두 범주로 구분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당시 로마교회는 내분에 휩싸여 있었다. 유대인 그리스도인과 이방인 그리스도인의 율법 이해와 삶의 방식 차이 때문이었다. 그래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 진리 안에서 서로 간의 화해를 원했다. 그래서 성의 문제를 다루며 마치 유대인의 생활방식 옹호하는 듯, 전통적인 정결법을 중시하는 듯, 이방인은 더럽다는 편견을 지니고 있는 듯 썼다는 것이다.


그러나 윤리 문제를 다룰 때는 일반화를 통하여 유대인을 포함하여 모든 자기 의에 빠져 있는 자들에 대하여 경책하고 있다고 본다. 궁극적으로 이 본문은 동성애를 정죄하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동성애를 정결법의 이름으로 정죄하고 있는 유대인들도 이방인들과 마찬가지로 우상숭배에 빠져 있음을 밝히려 하는 데 주목적이 있었다고 말한다.


헬미니아크는 바울이 동성애 문제를 소재로 삼은 것은 이 문제가 이방인 그리스도인과 유대인 그리스도인의 충돌을 피할 수 있는 ‘안전지대’였기 때문은 아니었는지 질문한다. 만약에 동성 성교 대신 음식이나 할례 문제로 예를 들었다면, 아마도 로마 교회는 분열되고 말았을 것이라고 지적한다.


헬미니아크는 "역리로(Para Physin)"라는 개념이 사회 관습적인 것인지 자연법적인 것인지를 논한다. 바울은 자연(physis) 개념을 그때그때 다양하게 사용한다. 갈라디아서 2장15절과 로마서 2장27절에서 "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이방 죄인이 아니로되" 에서는 물리적인 개념으로 사용한다. 로마서 2장14-15절에서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라고 말 할 때는 본능적인 개념으로 사용한다. 갈라디아서 4장8절에서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노릇 하였더니"라고 할 때는 영적인 개념으로 쓴다. 그리고 고전 11:14, "만일 남자에게 긴 머리가 있으면 자기에게 부끄러움이 되는 것을 '본성이' 너희에게 가르치지 아니하느냐"에서는 성격(character)의 개념으로 사용한다.


이런 면에서 바울에게 '순리(the natural)'란 오늘날과 같은 자연법 사상에 기초한 보편법(universal law)을 따라 행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공동체가 일반적으로 원하는 대로 행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따라"에 해당하는 파라(para)도 반대(against)보다는 "~외에 (beside)"라는 의미가 더 크다. 그러므로 "역리"란 자연법에 대한 대립이 아니라 일반적인 유형에서의 일탈(the atypical)을 의미하는 것으로, 사회적으로 스캔들일 수는 있으나 도덕적 정죄의 대상은 아니라는 입장이다.


탐색하는 자와 남색하는 자에 대한 세 가지 해석


마지막으로 살펴볼 부분은 바울 서신에 등장하는 '탐색하는 자(말라코이 Malakoi)'와 '남색하는 자(Arsenokoitai 아세노코이타이)'에 대한 해석이다(고전6:9-10,딤전 1:9-10).


돕슨을 비롯한 근본주의자들은 이 본문들을 인용하여 동성애자는 심판의 대상인 불의한 자들 중 하나임을 강조한다. 고린도전서 6장9-10절에서는 하나님나라 유업을 받지 못하는 불의한 자들의 목록(음행, 우상숭배, 탐색, 남색, 도적, 탐욕, 술 취함, 모욕, 속여 빼앗음) 가운데 '탐색하는 자', '남색하는 자'가 들어가 있다. 그리고 딤전1:9-10에서 심판의 율법이 누구를 위해 있는 것인가라는 질문에 이 '남색하는 자'가 들어있다. 그래서 탐색과 남색은 동성 행위를 통한 성적 타락으로 율법에 의한 심판의 대상이 되기 때문에 피해야 할 도덕적 타락으로 이해한다.


복음주의자 헤이스도 이들이 불순종하는 자들 중, 한 부류로 언급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고 본다. '탐색하는 자'란 동성행위에 참여하는 '수동적인 파트너'로 '어린 소년(young boy)'을 지칭하는 당시 속어였다고 한다. '남색하는 자'는 히브리어의 "남자와 함께 누워있는 자(mishkav zakur)"에 해당하는 말로 레위기 정결법에서 금했던 종류의 동성 행위자를 말하는 헬라어 신조어였다고 한다. 이 부류의 사람들은 율법이 없고 불순종하는 자들 중 하나로 채택되고 있다.


헬미니아크는 이 본문의 주된 핵심은 동성애 자체가 아니라 성의 남용이 문제라고 강조한다. '탐색하는 자'는 일반적으로 부드러운, 여성적인 남성을 가리키는 단어로서 윤리적으로는 나사가 풀린 듯한 남성, 자기통제가 잘 안 되는 남성을 가리킨다고 본다. 그리고 막대한 재정 손실을 초래하면서까지 개인의 즐거움에 빠진 사람들을 가리킨다. 또한 돈을 벌기 위해 남성간의 성교에 자신의 몸을 파는 "여성스러운 소년"을 지칭한다.


'남색하는 자'는 남자나 여자와의 성관계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하는 남자를 가리킨다. 그래서 남자나 여자에게 자신의 몸을 파는 남자, 특히 돈 많은 부자 노인의 재산을 물려받기 위해 그 노인을 몸으로 부양하는 남자 매춘부를 말하기도 한다.


정리하자면, '탐색하는 자'는 자신의 몸을 파는 남자 매춘부 중 수동적인 역할을 하는 쪽을, '남색하는 자'는 능동적인 역할을 하는 남성을 가리킨다. 즉 이 본문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동성애 자체가 아니라 매춘행위와 아동 학대라는 것이다.


자기주장 위해 성경 인용할 때 적합한지 물어야


이상의 성경 본문들에 대한 다양한 해석들을 접하면서 이 본문들이 정확히 오늘날 논란이 되는 성 정체성으로서의 동성애(Homosexuality)에 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인지에 대한 질문이 생긴다.


즉 현실의 어떤 현상을 비난하거나 옹호할 때 인용하는 성경의 본문이 개념적으로나 내용적으로 적합한 것인지에 대한 질문이다. 동성애에 관한 성경적 관점을 찾는다고 할 때 주의해야할 대목이라 생각된다. 또한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이 직접 언급하고 있지 않거나, 성경이 언급하고 있어도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큰 비중을 두고 다루지 않는 이슈들에 대하여 우리는 어떤 규범을 세울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마지막으로 동성애에 대한 생물학적·사회적·심리적·문화적 고려 없이 특정 성경 구절을 유추 해석하여 이 주제에 대하여 완결된 윤리적인 판단을 내세울 수 있나하는 점이다. 이런 질문에 긍정 혹은 부정의 입장에서 답을 찾아가면서, 다양한 삶의 방식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과 어떻게 함께 살아갈 수 있는지에 대한 길들이 찾아질 수 있기를 기대한다.


천진석 / 남가주 살림교회 담임목사 

Posted by cwn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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